비극을 선택한 소시민들
비극을 선택한 소시민들
스스로를 오만하게 영웅처럼 지낼 때는 언제이고
지금은 비극의 주인공처럼 무능력을 자처하고 있다
왜일까?
그럼 자기를 알아줄까 해서!
그럼 자기 체념에 눈물이나 흘려줄까 동정을 구걸하나!
그냥 캄캄해서?
끝도 없이 시달리느니,
지혜롭기 포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자기 자기 안에 남아있는 오만이 비극을 선택하는 것은 아닐까?
나름 인생의 선택이라 하지만
누구나 선택할 수 있는 후안무치함은 아닐런지?
탓할 것은 많아도 자기 책임을 빗겨 갈 수는 없다!
자기에게 남아 있는 오만이든 자만이든 자존심이 있다면 말이다?
비극의 주인공은 결국 자기 자신과 다른 모두를 위해 어쩔 수 없는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그 고난이 제3자에게 그 우메함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목적이 분명하다. 대책 없이 비극의 선택은 신마저 외면하게 한다면 신마저 무책임한 존재가 된다. 그런 그 인간의 작은 존재감마저 무책임한 영원한 존재를 스스로 입증하게 된다.
비극도 아름답다는 것을 아는가?
부모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 자식은 그 부모의 희생으로 새 생명을 얻어 또 다른 생명을 이어가게 하여 그 비극은 영원함을 가능하게 하지
자식은 그 부모의 보답을 위해 기적을 이루는 것은 그 효로 공동체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두 남녀의 뜨거운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그 사랑으로 그 사회에 대해 긍정의 힘을 갖기 때문이다
나라를 위한 희생은 결국 그 소수의 희생으로 대의가 살아 공동체가 유지가 되고 계속 그 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소시민의 비극은 그저 공동체의 붕괴이고 대의가 없는 지역사회의 추락으로 서로 못 볼 것을 보게 할 뿐이다
비극은 아무나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소시민의 비극은 추해도 살고자 버둥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신도 그 모습에 아무런 댓꾸를 하지 않는 것은 신마저 무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어떤 영웅도 살아있는 생명에 그렇게 애절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신의 피조물이라 한 보잘 것없는 그 존재가 살고자 스스로 버둥되는 것만큼 신을 더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그 애절하고 간절한 마음들이 모여 신이 있어야 함이 된 것이고, 그 신이 있다는 믿음이 대의가 되었던 것이다. 그 보잘 것 없는 소시민이 모든 영광을 창조하고, 신이 있음을 믿게 하는 것은 소시민의 삶에 대한 발버둥으로 인해 창조된 것이다. 모든 영웅은 이 보잘 것 없는 피조물에 피조물일 뿐이다.
살려고 버둥되는 그 소시민의 비극은 신을 창조하게 하고 영웅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는 신도 영웅도 없다. 그저 소시민의 삶의 흔적만 남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