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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함은 멀리에 있지 않다

우태닝 2016. 4. 5. 13:33

탁월함은 멀리에 있지 않다

 

소비 생활에 익숙한 현개인에게 명품 소비와 우아한 소비는 하나의 행복처럼 익숙해져있다. 어쩌면 익숙한 것이 아니라, 길들여진 것이다. 어린 왕자와 장미에 대해서 사막 여우가 하는 말처럼 좋은 의미가 아니다. 그저 단순하게 개가 인간에 길들여진다는 말이다. 노예가 되어 주인 방식대로 사는 것이고, 소비는 자기가 원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생산자에 자기 자신를 맞추는 길들여짐이다. 여기에 탁월함이라 생산자의 뛰어난 속임수이지, 소비하는 주체로서 탁월함이란 없다.

 

소비에 대해 탁월함이라 탁월하게 개처럼 노예처럼 악숙해지는 것뿐이다. 자산가나 자본가는 소비함으로 투자와 생산에 대한 효율이 증가해서 더욱 길들여지고 익숙한 자유로운 착각의 노예라는 소비층이 두터워 질 뿐이다.

 

진정한 탁월함이란 생산자가 자기가 원하는 것에 따라 재료를 선택하고 재료를 디자인하고 재단과 같은 가공을 하며 문양과 무늬를 넣어 더 빼어난 모양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현대에 와서는 기능성과 수월성과 효율성까지 접목되어 최대의 이익을 가져 온 것이다. 이 탁월함은 생산과정에 있지 결과의 소비에 있지 않다. 만일 소비에 있다면 착각이나 부러움이나 질투를 이용해서 누군가 기만한 것에 불구하다. 이를 탁월함이라면 너무 탁월함에 부족함을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앞선 언급한 생산과정에서의 탁월함이란 분명 손쉽게 가능한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쉽지는 않은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것만은 분명하다. 탁월함에 상상 그 이상은 아닌 것이다. 절대로 그럼 탁월함은 실현되지 않았을 것이다. 절대로.

 

탁월함의 시작과 끝은 동일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생산과정에서도 똑같은 것을 생산해도 실제는 다 같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탁월함이 같은 것처럼 했을 뿐이다. 이 보다 탁월함은 개별성이 매우 큰 것이다. 이리 강조할 필요도 없는데 너무 단순하게 여김으로 해서 강조하는 것뿐이다. 또한 이는 관념이고 언어가 단정지어서 탁월하게 상상, 아니 착각하게 하는 것이다. 실상은 인간이 지어낸 착각이 탁월함이다.

 

하나의 존재가 어떤 관념의 기준으로 다른 탁월함을 가려버린 것이다. 저마다의 개별성이 대량 생산 세계에 다른 의미와 가치를 잃어서 오히려 탁월함을 잃은 것이다. 자기 자신의 탁월함이 아니라, 남의 탁월함이 자신의 탁월함을 가려버린 것이다.

 

바로 자기 자신이 탁월한 것이고 내 주변의 재료를 탁월하게 생산할 탁월함이 내가 탁월하게 간직해야 하는 것이다. 내 자신의 일부를 보다 더 빼어나게 하는 것이 주요하지, 남의 빼어나게 한 것을 소비해서 자신의 탁월함이 들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 탁월함이 다른 존재의 탁월함이 더 좋아지는 과정이 어린 왕자의 길들여짐이다. 좋은 개념은 더 좋은 것에 도달하게 도움을 준다. 나의 탁월함이 누군가에 탁월함이 더 빼어나게 한다면 말이다. 이게 노예처럼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존중된 것이어야 서로 탁월해 지는 것이다.

 

함께 할 수 없는 탁월함이란 누군가는 개처럼 주인에 의해 생명과 존재감을 잃게 되는 것이라면 진정한 탁월함이 아닌 것이다. 항상 가까이 있고 특별하지 않은 것 같아도 소중한 것으로 변화되게 하는 것이 탁월함이 아닌겠는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