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혼돈 속에 사랑

우태닝 2018. 3. 18. 01:00

혼돈 속에 사랑

 

남녀 젊은 노비가 도망을 쳤다. 서로 사랑을 해서 평생 함께 살려고. 그런데 둘은 결국 붙잡혀 다시 돌아왔다. 노비 한 놈은 두들겨 맞아 다리 반병신으로 계속 노비가 되었고, 한 노비는 멀리 시집을 가서 애낳고 살게 되었고 모든 것이 잊혀지겠지 하겠지만, 나는 이 얘기가 그냥 생각이 난다.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욕망과 인간의 나약한 의지는 환경에 따라 적응도 하고 극복도 된다. 때론 개인 의지에 따라 다르거니 하겠지만 그것도 운이라면 운이고 환경에 따라 그 결정적인 순간에 정해진 빙향에 따라 극복도 좌절도 한다. 인간 의지도 운에 따라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그 고비에 인간 의지에 따라서 벗어날 확률이 높았을 때 인간 의지가 생기는 것이다. 사랑도 의지가 있어 도망가겠지만 그 확률이 높았기에 시도가 가능해 진 것이다. 만일 두 노비가 다시 합칠 환경 확률이 높았다면 해피엔딩이었을 것이다. 또한 두 남녀가 포기하지 않을 환경 그 결정적 순간이 주어졌었다면 인간 의지가 분명 들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 욕망은 이를 좌절시킬 폭력과 반인륜적 행태에 대한 폭력이 암묵적 인정이 있게 되는데 이게 지위이고 권위이다. 조그마한 양심이나 도덕적이었다면 최소한 두 남녀에 대한 가능성은 높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가능성은 암묵적 침묵에 의해 더 낮았던 것이다. 이는 개인에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집단적 문제이다. 그 집단을 지배하는 의식에 따라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이 가능성 있는 의식이 도망칠 기회적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 지배층은 그 의식을 꺾어버리고 그 숨은 무의식마저 좌절 시킨 것이다. 이에 집단 무의식은 그안에 존재하는 폭력에 길들여 지는 것이고 그 지배안에 집단 무의식은 그 한계 안에 갖히게 된다. 국경을 초월한 사랑보다는 이 사회적 집단적 무의식을 깨고 사회적 의식을 넘는 것이 초월적인 사랑일 것이다. 이를 실현할 의지가 진정한 의지일 것이다. 진정한 인간 의지는 환경 확률이 높아야 하고 사회적 그 집단 의식에 꺾이지 않는 것이다. 그 보다 더 강한 것은 그 집단을 지배하는 무의식 너머에 존재하는 사랑이어야 진정 이루어야 할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이 나약한 이유는 의식도 무의식도 집단 환경 확률에 갖혀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가장 안좋은 환경은 인간이 만든 거짓이라는 의식과 무의식 속에 혼돈해 있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