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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관련 문헌

우태닝 2012. 7. 21. 08:01

한단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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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에 나타난 고조선

 

 

민속학전공 20060122 권설희

 

 

 

※目 次※

 

1. 들어가며

2. 문헌에 나타난 고조선

1) 중국문헌의 고조선

2) 한국문헌의 고조선

 

3. 나오며

 

 

 

1. 들어가며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로 인해서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사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로인해 고구려사를 다룬 드라마인 ‘주몽’과 ‘바랍의 나라’가 이른바 ‘시청률 대박’을 터트리며 고공행진을 하여왔다. 드라마의 인기와 더불어 대중들의 관심도 높아진 바 있다.

하지만 한민족의 첫 나라인 단군에 대한 드라마는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고조선의 역사에 대해서 서술한 우리의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삼국유사나 재왕운기 그리고 중국의 여러 서적에서는 고조선에 관한 이야기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중국과 한국의 역사서에 나타난 기사들을 분석해 보면서 단군과 고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2. 문헌에 나타난 고조선

 

 

1) 중국문헌속의 고조선

 

(1) 산해경(山海經) - 고조선의 위치

고조선의 위치에 관해서는 《산해경》<해내경(海內經)>과 <해내북경(海內北經)> 에 기록이 되어 있다.

 

 

【원문 1】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 名曰朝鮮.

동 해 지 내, 북 해 지 우, 유 국, 명 왈 조 선.

 

《산해경(山海經)》권 18 <해내경(海內經)>

 

 

【원문 2】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조 선 재 열 양 동, 해 북 산 남, 열 양 속 연.

 

《산해경(山海經)》권 12 <해내북경(海內北經)>

 

 

《산해경》은 곽박이 춘추시대 말기부터 전한시대에 걸쳐 여러 곳에서 작성된 기록들을 편집한 책이라 여겨진다. 때문에 《산해경》안의 각 경마다 차이가 있어, 조선에 대한 기록 또한 언제 것이라고 단저하기 어렵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기록연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다만 전국시대 이전의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최근 몇몇 학자는《산해경》에 나타나 있는 모슨 사항이 곽박이 살았던 시기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존재해오던 것이었을 수도 있다고 본다.

[원문1]의 내용을 번역하면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으니 조선이다.” 이다. 그리고 [원문2]의 내용을 번역하면 “조선이 열양의 동쪽,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에 있었고, 열양은 연에 속했다.”이다. 《산해경》을 통해서는 고조선의 대략적인 위치는 알 수 있으나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산의 남쪽’이라는 문구이다. 산은 의무려산이라는 견해는 많으나, 정확한 근거 자료가 없다.

 

 

(2) 관자 - 고조선의 대외 활동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사상가 ·정치가인 관중(管仲:?~BC 645)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 내용으로 보아 제나라의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되던 현상(賢相) 관중의 업적을 중심으로 하여 후대의 사람들이 썼고, 전국시대에서 한대(漢代)에 걸쳐서 성립된 것으로 여겨진다. 전한(前漢)의 학자 유향(劉向)의 머리말에는 86편이라고 되어 있는데, 현재 보존되어 있는 것에는 10편과 1도(圖)가 빠져 있다. 내용은 법가적(法家的) 색채가 농후하고, 때로는 도가적(道家的)인 요소가 섞여 있기 때문에 《한서(漢書)》에서는 도가(道家)에, 《수서(隋書)》에서는 법가(法家)에 넣고 있다. 정치의 요체(要諦)는 백성을 부유하게 하고, 백성을 가르치며, 신명(神明)을 공경하도록 하는 세 가지 일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일이 으뜸이라고 하였다.

 

환공이 말하기를 “사이가 복종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잘못된 정치가 천하에 퍼져서 그런 것이 아닌지 나로 하여금 걱정하게 하는데, 내가 이를 위해서 행할 방법이 있겠소.” 관자가 말하기를 “오와 월이 내조하지 않은 것이 진주와 상아의 폐물 때문이라 생각되며, 발과 조선이 내조하지 않은 것은 표범 가족과 모직 옷을 폐물로 요청하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 한 장의 가죽이라도 충분한 가격으로 계산해 준다면 8천 리 떨어진 발과 조선도 내조할 것입니다.”

 

-《관자(管子)》 권 23 〈규도(揆道)〉-

 

이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서기전 7세기 춘추시대에 중국과 고조선은 이미 특산물을 폐물로 교환할 정도의 교류가 있었다는 것이다. 관자의 설명에 따르면 사신이 폐물로 가져간 특산물에 대해 비싼 가격을 쳐주었으므로 사신의 왕래에 따라가는 폐백은 일종의 관무역품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관자는 발과 조선을 9천 리 떨어진 곳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조선은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8천리라는 거리의 기점이 당시 제국의 도읍인 임치인지 주나라의 도읍인 낙읍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환공은 제후이면서 동시에 패자로서 주 왕실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나라의 당시 도읍인 낙읍을 중심으로 말했을 가능성이 있다.

 

 

2) 한국 문헌에 나타난 고조선

 

 

(1) 삼국유사

삼국유사는 고려 말 일연(一然)스님이 지은 역사서이다. 이 책에는 이 전에 편찬된 삼국사기와는 다르게 구전되어 내려오던 단군신화에 관한 내용이 처음으로 서술되어있다. 그런 면에서 의의가 큰 역사서라 할 수 있다. 삼국유사의 내용을 보면 이렇다.

 

 

위서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해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는데, 고高(요堯) 같은 시기였다고 하였다. ≪고기 古記≫에 이러기를, … 이름을 단군 왕검(壇君王儉)이라 하는데, 당고가 즉위한 지 50년 되는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불렀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는데, 그곳을 또 궁홀산이라고도 부르고 금미달이라고도 한다. 나라를 다스린 지 1500년 되는 해인 주 호왕 즉위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장경당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로 돌아와 은거하다가 산신이 되었다. 수명이 1908세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기이(紀異)〉「고조선(古朝鮮)」왕검조선(王儉朝鮮)-

 

 

이 사료는 ≪삼국유사≫ 「고조선」조의 기록 가운데 후반부로 단군신화로 알려진 부분의 뒤를 이어 기록된 내용이며 고조선의 건국과 도읍에 관한 것이다. 이는 사실에 근거한 신화이이다. 건국된 연대나 도읍 명칭 또는 그 이동 사유와 순서 등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논의가 있을 수 있지만, 그 내용 전체를 전혀 근거 없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 사실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이 기록은 몇 가지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첫째, 고조선의 건국자는 단군 왕검이고, 건국 연대는 중국의 오제(五帝) 가운데 한 사람인 요와 같은 시대였다는 것이다.

둘째, 고조선은 네 번 도읍을 옮겼다는 사실이다. 도읍명은 아사달, 평양성, 백악산 아사달, 장당경, 아사달 등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곳들이 지금의 어느 곳이었는지는 고증을 거쳐야 하겠지만 이렇게 여러 곳으로 도읍을 옮겼다면 그 영토가 상당히 넓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셋째, 서주 초 무왕 때 기자가 망명해 오자 단군은 도읍을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다시 아사달로 돌아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한 뒤에도 고조선은 상당히 오랜 기간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아사달로 돌아왔다고 했는데, 이사달은 이전에도 도읍을 한 적이 있는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2) 제왕운기

제왕운기는 고려 말 이승휴(李承休)선생이 지은 책이다. 단군신화는 《삼국유사》에 실린 것과 내용이 비슷하다. 이승휴 선생은 일연 스님과는 거의 같은 시대의 사람이다. 그런데 일연 스님은 승려였으나 이승휴 선생은 유학자였다. 서로 다른 학문 배경을 지닌 두 사람이 같은 내용의 단군신화를 기록해 놓았다는 것은 그것이 당시에 꾸며진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이전부터 전해왔을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문헌 가운데 《삼국유사》와 더불어 고조선에 관해 소략하지만 비교적 체계적인 기록을 싣고 있다.

 

 

처음에 누가 나라를 열고 바람과 구름을 인도하였던가. 석제(釋帝)의 후손으로 그 이름은 단군(檀君)이었다. 제고(帝高)가 일어난 시기와 같은 해 무진년에 나라를 세워 제순(帝舜)시대를 거쳐 하나라 시대를 지나기까지 왕위에 있었다. 은나라 무정 8년 을미년에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 나라를 다스리기 1028년인데, 어쩔 수 없는 그 변화 환인으로부터 전해왔다. 그 뒤 164년 만에 어진 사람이 나타나 겨우 군주와 신하를 부활시켰다.

 

-《제왕운기(帝王韻紀)》 권 하(下 ) 〈전조선기(前朝鮮紀)〉-

 

 

이 기사에서는 한민족의 첫 번째 국가인 조선을 건국한 사람은 단군이라 말하면서 고조선은 1028년 동안 존속했고, 고저선이 망하고 164년이 지난 뒤 기자가 그 곳에 와서 후(後)조선을 세웠다고 말하고 있다. 이 점은 삼국유사의 기록과 매우 다른 것으로 고대사 체계의 차이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단’자의 표기이다. 《삼국유사》에서는 제단 단(壇)자를, 《제왕운기》에서는 박달나무 단(檀)자를 쓰고 있다. 이것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자료에 의거하여 단군신화를 전하였을 가능성을 말해주며, 단군은 한자 명칭이 아니라 한민족 언어 명칭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단군을 한자로 음사하는 과정에서 음이 같으나 뜻은 다른 한자를 서로가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다음 기사는 고조선의 영역에 관한 것이다.

 

 

요동에 별도의 세계가 있으니 중국의 왕조와 확연히 구분된다. 큰 파도 한없이 넓은 바다가 삼면을 둘러쌌고 북쪽은 대륙이 있어 선처럼 이어졌는데, 그 가운데 사방 천리가 바로 조선이다. 강산의 형태가 빼어남은 그 이름이 하늘에 이르렀다. 농토를 경작하고 우물을 파며 예의를 실천하는 집들, 중국인들이 이름 짓기를 소중화(小中華)라 하였다.

 

-《제왕운기(帝王韻紀)》 권 하(下) 〈지리기(地理紀)〉-

 

 

고대의 요동은 지금의 요동과 그 위치가 맞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근거가 없다. 하지만 기사 내용 중에서 “그 가운데 사방 천리가 조선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조선은 고조선 전체를 말하는지, 고조선 영역 안의 단군 직할지만을 말하는지, 그 면적은 어느 정도인지 등 밝혀야 할 우리들의 과제로 남아있다. 그런데 고조선의 위치와 영역을 한반도로 국한해서 말하지 않고 요동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시사를 말하고 있다.

 

 

3. 나오며

 

이상으로 중국과 한국의 문헌에 기록된 고조선에 관한 기사들을 살펴보았다. 중국에서는 중화사상에 입각한 중국의 변방국 정도로 인식을 하고 있고, 한국에서는 한민족의 최고의 나라로서 신화적인 면이 많이 강조되고 있다. 이는 한국에서는 고조선의 역사에 관한 정사(正史)가 없고,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 기록된 구전된 이야기와 그것을 연구한 서적들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정확한 사료의 고증과 함께 더 많은 연구를 통하여 고조선사(古朝鮮史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 참고문헌

『사료로 보는 우리 고대사』윤내현 엮음, 지식산업사, 2007

『고조선의 사라진 역사』성삼제 지음, 동아일보사, 2005

네이버 백과사전(www.100.naver.com)

홍산문명이 왜 고조선인가? by 궁宮 태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