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blog.naver.com/neoseed/70010621249
http://blog.naver.com/donmany0203/30092816143
|
4. 중국문헌과의 비교검토 『한단고기』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에 대해 현재 비교적 신빙성있는 사료(史料)로 인정되고 있는 중국의 사서들과 비교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중국측에는 정사(正史)로 인정되는 ‘25史’외에도『죽서기년(竹書紀年)』,『설문(說文)』,『춘추좌전(春秋左傳)』,『자치통감(資治統監)』, 『산해경(山海經)』 등의 고서(古書)들이 있고,『맹자(孟子)』,『논어(論語)』,『시경(詩經)』, 『서경(書經)』등의 유가경전에도 역사적 사건에 대한 단편적 기록들이 남아 있다. 한민족에 관한 기록은 한나라 사마천이 지은『사기(史記)』이후의『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등에 와서야 「동이전(東夷傳)」이나 「조선전(朝鮮傳)」으로 체계화되지만, 그 이전시대에는 중국중심의 역사서술에 단편적으로 삽입되어 있거나 사물의 기원, 이민족의 풍습 등을 소개할 때 간혹 등장하곤 한다. 우선 중국내륙지역과 가장 접촉이 빈번했던 시기로 알려지는 고조선의 실체인 단군조선(檀君朝鮮) 시대의 기록을 검토해 보자. 이는 단군조선의 건국(B.C.2333)이후 중국내륙인 중원지역에 왕조라 인정할 夏·殷·周·春秋戰國時代 등이 전개되어 중국의 역사기록과 비교할 수 있는 자료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1) 기독교의 구약성서에는 홍수설화가 있는데 밝혀진 바로는 슈메르문명(기원전 3천년경의 메소포타 미아지방)의 홍수설화와 유사하며, 지질학적으로도 기원전 2천년 전에 지구에 큰 홍수가 있었다고 한다. 홍수에 관해서는 동양의 고대사에도 유사한 기록이 남아 있다. 『한단고기』중의 『단군세기』 와 『태백일사』「삼한관경본기」번한세가(番韓世家)편에 1세 단군왕검때(丁巳50년, B.C.2284) 큰 홍수가 있었는데 풍백인 팽우에게 명하여 치수사업을 성공시켜 이를 극복하고 그 비법을 중원지역 요순시대(堯舜時代) 순(舜)이 파견한 우(禹)에게 태자 부루(扶婁)를 도산(塗山)에 파견하여 치수를 위한 삼보(三寶)를 전해주고 국경을 정해 유영지방(幽營地方:북경일대)과 회대지방(淮垈地方: 산동지역과 양자강하류역)의 동이(東夷)제후들을 평정하여 직접 분조(分朝)를 두어 당시의 중원 정치를 감독하게 하고 직접 5년마다 순수하시어 순(舜)이 네 번이나 조근(朝覲)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때 전해준 삼보로는 ‘王土의 篆(문자의 일종)이 새겨진 천부왕인(天符王印)’, ‘물의 깊고 얕음을 측정할 수 있는 신침(神針) 일매’, ‘험하고 중요한 곳의 물을 진압할 수 있는 황거종의 보물’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법을 적은 금간옥첩(金簡玉牒)을 주었는데, 『오월춘추(吳越 春秋)』에는 “금간옥첩을 창수사자(蒼水使者)가 夏의 禹에게 준 치수의 비결”로 기록되어 있어 대비 된다. 중국고대에는 삼황오제(三皇五帝)시대가 있었는데 삼황으로는 염제신농, 태호복희, 황제헌원 등이다. 『한단고기』중 『삼성기』나 『태백일사』「신시본기」등에는 삼황의 인물들이 모두 한웅시대의 후손으로 중원지역에 발달된 문화를 전파하고 정착한 것으로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오제의 인물 들도 역시 같은 계보를 지닌 것으로 나와있다. 순임금도 동이계통으로 확인되는데, 『맹자(孟子)』이루장구(離婁章句) 하편에, - 순은 제풍에서 나고, 부하로 옮겼으며, 명조에서 졸하였는데, 동이의 땅이고, 순은 동이인이다(舜生於諸風, 移於負荷, 卒於名條, 東夷之地, 舜東夷之人也) - 라 하였고,『한단고기』에는 순의 아버지 유소씨(有巢氏)가 단군조선의 신하로 기록되어 있다. 단군 조선에서 분조를 두고 산동지방 낭야성에 5년마다 순수하였다는데, 이에 대해 『서경(書經)』虞書 舜傳을 보면, - 2월, 동쪽으로 순수하여 대종에 이르러 시일을 협의하고 도량형을 맞추며 오례의 법을 닦고 다섯가지 옥과 세가지 비단, 두가지 산짐승과 한가지 죽은 짐승의 예물을 정리하였고, 다섯가지 제기는 제사가 끝난뒤 되돌려 주었다.(歲二月,東巡守之于岱宗,協時月正日,同律度量衡,修五禮五玉三錦二生一死執如五器卒乃復) - 고 하였다. 중국에서 최초의 왕조로 불리는 하(夏)의 시조 우(禹)가 치수사업에 성공하여 그 공으로 군장위를 이어받았는데, 우의 성공비결은 창수사자에게서 나온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중국사람들의 춘추필법(春秋筆法:중화중심의 역사관)은 창수사자라는 모호한 명칭으로 진실을 가리고 있지만,『한단고기』는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해 대단히 명쾌한 설명을 해 주고 있는 것이다. 2) 현재의 중국사에서는 산동지방과 양쯔강일대 평야지대에 옛부터 동이족들이 터전을 마련하고 생활 해왔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들은 북방에서 이주해 온 종족이며, 황하문명을 꽃피운 은(殷)나라도 이들 동이계통이 세운 고대국가였다. 이러한 결론에는 중국지역의 고고학적 발굴성과가 큰 몫을 담당 하였다. 중국사에 등장하는 동이관련 기록은 단편적이나마 그 원형을 살펴볼 수 있으므로 이를 『한단고기』의 기록들과 비교검토해 보자. 『단군세기』 4세단군 오사구(烏斯丘)조를 보면, - 임인19년(B.C.2119) 하나라 주 상이 덕을 잃어 단군께서 식달에게 명하여 남·진·변 3부의 병력을 이끌고 그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천하가 이를 듣고는 모두 복종하게 되었다. -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후한서(後漢書)』「동이열전(東夷列傳)」에는 - 하후씨 태강이 덕을 잃어, 동이인들이 모반을 시작하였다. 註에 태강은 익으로 하여금 물리치게 하였다.(夏后氏太康失德,夷人始畔...註,太康...爲익所퇴也) - 라고 되어 있고, 『죽서기년(竹書紀年)』 夏王 相元年(B.C.2146)조에는 - 원년에 견이를 정벌하고, 2년에 풍이와 황이를 정벌하고, 7년에 우이가 내빈하였다.(元年,征犬夷,二年,征風夷及黃夷,七年,于夷來賓) - 라고 되어 있다. 夏의 태강과 상은 각각 다른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단군세기』는 이에 대해 두사람을 한사람 으로 혼동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 관해서는 『규원사화』「단군기」에 보다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규원사화(揆園史話)』는 연대설정이 『한단고기』와 다르지만, 내용상의 흐름은 『한단고기』와 유사하여 상호 참고될만 하다. 『규원사화』「단군기」3세단군 가륵조와 4세단군 오사구조를 보면, - (가륵조)때에 夏王이 失德하여 그 신하중 찬역(왕을 추방)하는 자가 있었다. 이에 식달로 하여금 남진번의 백성을 이끌고 이를 정벌하니 국위가 더욱 빛났다. (오사구조) 夏王 后相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후에 사신을 보내 화친하고 서로 통교했다. - 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건의 개요를 보면 동이가 하왕 태강을 정벌하여 이겼지만 상에게는 진 것으로 되어 있고, 이는 중국의 사서들과 같은 내용이다. 중국의 고대사서에는 동이족을 구이(九夷)로 나누어 불렀다. 견이(犬夷), 풍이(風夷), 황이(黃夷), 백이 (白夷), 적이(赤夷), 양이(暘夷), 우이(于夷), 방이(方夷), 현이(玄夷:鳥夷 혹 北夷) 등인데 조이(북이)의 위치가 발해북안지대일 것으로 보는 외에 다른 이족들의 중국내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불확실하다. 대개 이들 구이는 산동반도와 회대지방(양쯔강하류역)에 분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3) 하나라와의 관계사를 한가지 더 보자. 『단군세기』 11세단군 도해(道奚)조에 - 丁卯38년(B.C.1854)... 徵民가운데 장정을 뽑아 모두 병사로 삼고 選士 20인을 夏의 도읍으로 보내 처음으로 國訓을 전함으로써 위세를 보였다. - 고 하였는데, 중국측 『죽서기년』 夏王發 원년(B.C.1837)조에 - 發 원년, 諸夷들이 왕에게 인사하고 夷人들이 춤을 추었다.(帝發元年,諸夷賓于王門...諸夷人舞) - 라고 하여 단군조선과 하나라와의 친선관계를 보여주는 기록으로 연대도 유사하고 있다. 4) 夏나라는 은나라에게 멸망하였는데 은나라를 구성한 종족은 발달된 청동기문화를 꽃피웠으며 한자 (漢字)의 기원인 갑골문자(甲骨文字)를 사용한 종족으로 북쪽에서 내려온 동이계통으로 알려져 있다. 중원지역에서는 하와 은의 교체기에 동이족이 권력구도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데 『한단고 기』상으로는 단군조선의 결단에 의한 것으로 나타난다. 『단군세기』 13세단군 흘달(屹達)조에, - 甲午16년(B.C.1767) 겨울, 殷人이 夏나라를 정벌하니 夏의 桀王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단제께서 읍차인 末良으로 하여금 九桓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돕게 하니 殷의 湯王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다. 이에 말량에게 命을 내려 군대를 되돌리게 하였는데, 夏의 桀王은 조약을 위배하고 병력으로 길을 차단하며 약속을 깨려하였다. 이에 殷人들과 함께 夏의 桀을 정벌하기로 하여 몰래 신지 于亮을 파견하여 견이(夷)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낙랑과 합쳐 진격하여 關中의 분기땅에 점거하여 관제를 설치하였다. - 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의 구환은 구이를 말한다. 이는 환인,환웅의 자손이라는 의미이다. 낙랑은 고대 발해서북지역 지명이고 관중의 분기는 섬서성일대를 지칭한다. 이에 대한 중국측 기록인 전한(前漢)의 유향(劉向:B.C.77~)이 저술한 『설원(說苑)』夏王 癸(桀)52년(B.C.1767)條에 보면, - 탕이 걸을 토벌하려 하므로 걸왕이 노하여 구이의 군사를 일으켜 탕을 토벌하니 탕이 이에 사죄하였다.(湯欲伐桀,桀怒起九夷之師以伐之,湯乃謝罪) - 라고 되어 있고, 계속하여 53년조에 보면, - 탕이 걸왕에게 조공을 하지 않으므로 다시 구이의 군사를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구이가 군사를 일으켜주지 아니하므로 마침내 탕이 군사를 일으켜 걸왕을 토벌하여 남쪽변두리로 추방하였다.(湯不貢桀起九夷之師,九夷不起,湯乃興師伐之,遷桀南巢) -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상의 기사를 보면 구이(九夷)가 세력향방의 변수로 작용할만큼 막강한 힘을 가진 것으로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중국의 춘추필법으로도 감추지 못할 사건의 결과인 것이다. 이에 대해 『죽서기년』夏王 癸(桀)條에서는, - 계(걸)3년(B.C.1816)...견이인이 岐땅에 들어와 모반을 일으켰다. 6년(B.C.1813) 기땅에서 물러나고 사죄하였다.(帝癸三年...(田犬)夷人于岐以叛...六年岐踵戒來賓) - 라 하여 걸왕때 견이가 岐에 들어와 夏에 반하였다는 내용이 일치되고 있다. 『단군세기』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규원사화』에는 분기땅에서 철수하는 기사가 있는데, 철수 이후의 기록이 또한 『단군세기』에 전해지고 있다. 단군조선이 殷을 도와 夏를 멸망시킨 후 근 4백여년 동안 은과 지속적인 친선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규원사화』 단군 흘달(벌음)조에는, - 商王 湯이 어진 정치를 크게 베풀었으므로 단제께서 말씀하시기를 ‘德이 있는 임금으로 가히 서로 침범할 수 없다’하시고 이에 그 군사를 거두시고 후에 화해하였다. - 라고 되어 있고, 『단군세기』 15세단군 벌음(흘달)조에는, - 庚辰元年(B.C.1661) 殷主 小甲(B.C.1672~)이 사신을 보내 화친을 구했다. - 라고 되어 있는데, 『후한서(後漢書)』「동이열전(東夷列傳)」商湯元年(B.C.1766)條에, - 앞서 桀의 난리때 빈기사이의 땅에 침입하여 점거하고 있던 견이를 쳐서 물리쳤다.(先是,后桀之亂,(田犬)夷入居빈岐之間,成湯...興伐而攘之) - 라고 되어 있어 서로 비교된다. 5) 은나라와 지속된 4백년간의 친선관계가 단군조선 내부의 정변(政變)을 틈탄 은의 세력확장으로 깨어지고 정변을 수습한 단군조선은 마침내 은나라 내지(內地) 깊숙이 들어가 분국(分國)을 설립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중국역사에서 수수께끼의 나라로 전해지는 이른바 엄국(奄國)과 서국(徐國)의 실체가 구체적으로 밝혀 지는 부분으로 동양사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대목이다. 『단군세기』 21세단군 소태(蘇台)조를 보면, - 甲辰元年(B.C.1337) 殷왕 武丁(B.C.1339~B.C.1280)이 鬼方을 쳐서 이기더니 대군을 이끌고 索度,令支 등을 침공하였으나 우리에게 대패하여 화해를 청하며 조공을 바쳤다. - 라고 되어 있고, 『단군세기』 22세단군 색불루(索弗婁)조에는, - 丙申元年(B.C.1285) 11월, 제께서 몸소 九桓의 군사를 이끌고 여러차례 싸워 殷의 도읍을 격파하고 곧 화친하였으나 또다시 크게 싸워 이를 쳐부쉈다. 이듬해 2월 이들을 추격하여 黃河상에서 승전의 축하를 받고 弁韓의 백성들을 淮垈(양쯔강하류유역)의 땅으로 옮겨 그들로 하여금 가축을 기르고 농사 를 짓게 하니, 나라의 위세가 크게 떨쳤다. 乙卯20년(B.C.1266) 때에 藍國이 매우 강성하여 孤竹君과 함께 여러 적들을 쫒아내고 南으로 이동하 여 奄瀆忽에 머물렀으니 殷의 경계에 매우 가까웠다. 이에 黎巴達로 하여금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기땅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그곳의 유민과 서로 단결하여 나라를 세워 黎라 칭하고 西戎과 함께 殷의 제후들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藍氏의 위세가 매우 강성하여 단제의 교화는 멀리 恒山(하북서부지방) 이남의 땅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 라고 되어 있다. 계속하여 『단군세기』 23세단군 아홀(阿忽)조에, - 甲申元年(B.C.1237) 황숙인 固弗加에게 명하여 樂浪忽을 통치하도록 하고 웅걸손을 보내 藍國君과 함께 남쪽을 정벌한 군대로 하여금 殷나라 땅에 대읍을 설치하는 것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은나라 사람들이 서로 다투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니 마침내 병력을 진격시켜 공격하여 이를 격파하였다. 乙酉2년(B.C.1236) 藍國君 今達이 靑邱君,九麗君과 周?에서 회합하고 蒙古里의 병력을 합쳐 가는 곳 마다 殷나라의 城柵을 쳐부수고 깊숙이 오지로 들어가 淮垈의 땅을 평정하더니 浦古氏를 奄땅에, 寧古氏를 徐땅에, 邦古氏를 淮땅에 각각 임명하니 은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위세를 우러러 보며 두려 워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 라고 되어 있는데, 이상의 기록들은 또한 『규원사화』의 내용과도 동일하다.
전통적으로 동이족(東夷族)의 활동지역인 양쯔강하류의 비옥한 평야지대인 회대의 땅에 단군조선 초기의 분조(分朝)보다 더 대규모인 분국(分國)을 설치하였는데 이 분국들이 은나라 후대의 주(周)나라와도 지속적으로 세력을 다투게 된다. 『후한서』「동이열전」 - (商王)仲丁六,征于藍夷 - 『후한서』「동이열전」殷王武乙條 - 東夷寢盜,分遷淮垈,漸居中土,所謂徐夷是也 - 『후한서』「동이열전」周王勵條 - 勵王無道,淮夷入寇,王命괵仲,征之,不克 - 『후한서』의 기록에서처럼 동이의 강성함이 은나라와 주나라와 대등하면 대등하였지 결코 떨어지지 않음을 알수 있는데, 이후의 『단군세기』에는 특히 周나라와의 비교적 평화적인 관계가 지속되는 한편, 춘추시대(春秋時代) 이후의 초(楚),제(濟),조(趙) 등의 나라와도 관계를 맺고있는 것으로 나오고 단군조선 말기에는 특히 연(燕)과의 관계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춘추좌전(春秋左傳)』을 비롯한 주대(周代)이후의 문헌에도 동이구족(東夷九族)을 대표하여 ‘淮夷’,‘徐夷’등이 주나라와 춘추 시대 제후국들과 지속적인 투쟁의 관계를 맺고 있음이 보이고 있다. 중국내륙에서의 동이족의 활동을 중국사서와 비교해서 보았는데, 중국측 문헌에는 단군조선에 대한 언급없이 중원의 왕조와 관련되는 사건에 대해서만 단편적으로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순임금 때부터 서주(西周)까지 간간이 등장하는 ‘숙신(肅愼)’에 대한 전거가 단군조선의 ‘조선(朝鮮)’에 대한 일단의 실마리를 제공할 뿐, 중국내 동이족과의 관련 면에서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숙신’과 ‘조선’을 같은 명칭에 대한 다른 시대적 한자표기로 여기고 있지만, 종족 구성에 있어서는 ‘숙신’을 퉁구스 계통으로 보는 등 아직 일치하지 않고 있다. 중국사에 등장하는 ‘숙신’은 읍루(邑婁)와 물길(勿吉)로 이어지는 만주지방에 있던 고대의 종족명칭 이고 호시((木苦)矢:싸리나무화살),석노(石弩:석궁)가 유명한 곳으로 알려진다. 춘추시대이후의 문헌에 는 ‘조선’이란 국명이 정식으로 등장하는데 그 위치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과거의 한반도 위치 설에서 요녕지역으로 중심지가 이동되어지고 있다. 이는 고고학적 발굴성과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지만 문헌상에서도 조금씩 해석상의 오류를 수정하고 있는 결과이기도 하다. 『한단고기』의 고조선에 대한 역대단군들의 상세한 치세기록은 이러한 불확실한 역사에 대해 실로 명쾌한 해답을 주고 있고, 또한 사실들에 대한 기록이 중국과도 일치하고 있음을 주목하여 그 가치를 재고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헌적 비교검증 외에도 최근까지의 고고학적 발굴성과는 『한단고기』의 내용을 전반적으로 입증하고 있으며, 특히 이 책의 천문기록에 대한 과학적 검증은 『한단고기』를 단순 한 위작이 아닌 명백한 실제기록임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부분적 비판도 필요하겠지만 전반적인 검토가 더 중요한 시점이 된 것을 알아야 한다. 자료출처:유라시아드
출처: http://cafe.naver.com/voojiddang.cafe |
http://blog.daum.net/kmb2274/17044056
환단고기 등 상고사 문헌 가치 재조명 필요-국학원 학술대회
상고사 문헌의 가치 재조명 필요"
국학원 학술대회 열려
출처 :한민족의 뿌리와 미래 원문보기▶ 글쓴이 : 개척자.
|
학계의 중론은 "사료로서 신뢰할 수 없다"는 것. 20세기 들어와서 생긴 개념어가 등장하는 등 이 사서들의 많은 허점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역사학계의 상식이 된 상고사 위서론을 따지는 학술대회 '단군ㆍ선도사서에 대한 위작설을 반박한다'가 국학원과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주최로 13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다.
국학원은 "상고사 문헌들이 고유의 가치에도 불구하고 위작 논란으로 제대로 연구되지 못했다"며 "한민족 고유의 선도(仙道) 사상의 원류로서 이 문헌들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고 취지를 밝혔다.
기조발표를 맡은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민족주의적 맹신 못지않게 위험한 것은 20세기 이후 출간된 책을 모두 위서로 단정하는 태도"라며 "재야 사서를 인정하기를 덮어놓고 꺼리는 사학계의 태도가 혹 일제 식민사학의 영향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단재 신채호가 상고사 문헌을 위서로 인식했다는 학계의 주장에 대해, "<독사신론> <조선문화사> 등을 쓴 맥락을 살펴보면 단재도 상고사 문헌을 존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반박한다.
그는 "1972년 서지학자ㆍ금석학자들에 의한 검증 결과, 이 문헌이 늦어도 조선 중기에 존재했다는 점이 확인됐다"며 위작설을 일축하고 "이 문헌이 단군왕조의 실존을 보증해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조선 중기까지 단군왕조사가 실존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임 교수는 "<규원사화>의 가치는 당시로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민족 자주의식에 있다"고 강조한다. "고려말 이암이 고려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단군을 제시한 것처럼 양란 이후 조선 사회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규원사화>가 등장했고, 이것이 조선 말기의 단군 종교의 출현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맥락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회에서는 이밖에 <단기고사><삼성기> <천부경> 등 위작설에 휘말린 사서들에 대한 다양한 발표가 진행된다.유상호기자 <한국일보>
|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의 역사성에 관하여 그 실체를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다음의 몇 가지를 통해 그 진실성을 말해 보고자 합니다.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에 관한 기록이 풍부히 남아 있는 곳은 환단고기입니다. 여기서는 환단고기의 기록과 고고학적 물증을 기준으로 말하고자 합니다. 환단고기의 기록이 물증으로 증명되고 있는데도 환단고기의 사료가치성을 부정하는 제도사학계는 과연 어느 나라 국민인지 스스로 되물어야 할 것입니다.
(1)북경의 삼조당: BC 2707년에 있었던 배달국과 치우천자와 서토의 황제와의 전쟁은 동아시아 고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전쟁입니다. 최근 서토는 이 전쟁의 주요 당사자인 치우천자와 황제의 묘를 정비하고 그들을 서토의 정식조상으로 받아들여 북경의 탁록에다 삼조당을 세웠습니다. 환단고기는 동아시아를 뒤흔든 역사적 전쟁인 치우천자와 황제와의 전쟁기록을 가장 많은 분량으로 가장 완벽히 기록하고 있는 사서입니다.
(2)강화도 참성단: 강화도 마니산에 제천단과 참성단이 있어 역사적으로 해마다 천제를 지내온 바 그 첫 기록이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 왕검단군 무오 51년(BC 2284년)에 쌓았다고 나옵니다. 마니산 참성단은 지금도 의연히 환단고기 단군세기의 기록을 뒷받침하며 그 의연히 그 자태를 빛내고 있습니다. 서울 올림픽과 전국체전 성화채취의 기본성지가 되고 있습니다. 차제에 마니산 참성단은 국보로 지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3)평안도의 단군릉: 단군조선의 실재를 보여주는 것으로, 평안도 강동현에 있는 대박산에서 단군릉이 1993년 발굴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왕과 왕후로 보이는 유골이 발견되었으며, 북한은 이 단군릉을 거대하게 재축조하여 성역화 하였습니다. 이것 역시 BC 2084년 단군조선 제5세 구을 단군이 붕어하시고 대박산에 묻혔다는 환단고기 단군세기의 기록을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유물유적인 것입니다. 환단고기의 역사성이 여기서도 증명되는 것입니다.
(4)흘달단군 때의 오성취루: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와 대야발 선생의 단기고사에 는 단군조선 제13세 흘달 단군 50년(BC 1733년)에 5개의 별이 일렬로 서는 장관을 연출했는데, 이것이 서울대학교 박창범 교수에 의해 천문과학적 방법으로 증명된 것입니다. 세계적인 천문학자인 박창범 교수는 1734년 7월 13일 일몰 직후 금성, 목성, 토성, 수성, 화성 등 추가로 초승달까지 1렬로 지어 하늘에 나타나는 장관을 연출했음을 확인하였습니다(우연일 확률은 0.007%데 불과)
(5)갑골문의 귀방: 은나라의 갑골문에서도 환단고기 단군세기의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유물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즉 BC 1291년 단군조선 제21세 소태 단군 재위 때 은나라 왕 무정이 `귀방`을 쳤다는 기록이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 남아 있는데, 과연 은나라의 갑골문에서 은나라의 귀방정복 사실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서 세상을 놀라게 한 것입니다. 환단고기는 이토록 확실한 역사적 근거와 고고학적 근거를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6)아유타국과 백제상인: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는 `진역유기`를 인용하여 현재 태국에 있는 아유타국과 백제상인들이 교역한 기록이 남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백제가 현재의 캄보디아인 부남국과 교역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정확히 뒷받침해 줍니다. 이는 백제의 대륙존재설이나 해외경영의 한 단면을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인 것입니다. 이런 중요한 기록이 남아 있는 환단고기를 연구도 해보지 않고 위서 운운하는 것이 한국역사학계의 현실입니다.
(7)장수왕의 연호 건흥: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본기에는 고구려의 장수왕이 즉위하자, 건흥이러는 연호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건흥 연호는 1915년 충북 충주시 노은면에서 출토된 불상의 명문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불상에는 `건흥오년세재병진`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 그 정확한 근거가 나와 있습니다. 실로 대단한 기록이요 엄청난 고고학적 발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강단사학에서 무시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8)연개소문의 내력: 환단고기 태백일사에는 발해의 정사인 `조대기`를 인용하여 연개소문의 아버지 이름을 연태조, 할아버지는 자유, 증조부는 광이라고 했다. 그런데 1923년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된 연개소문의 장남 연남생의 무덤에서 연남생의 증조부 이름을 `자유`로 명기하고 있어서 환단고기 태백일사의 진가를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환단고기는 고구려 및 발해사와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에 대한 기록을 알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사서인 것입니다.
(9)이정기 장군과 제나라: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는 781년 고구려의 유장 이정기 장군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고구려의 유장 이정기는 중국대륙 산동반도 일대의 15개 주에 제나라를 건국하고 4대 58년간 다스렸던 사람인데 환단고기는 여기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고구려의 유장 이정기가 중국의 산동반도에 제나라를 건국하고 다스렸음은 KBS에서도 방영되어 그 역사적 사실이 인정되었습니다. 이처럼 환단고기는 위대한 사서인 것입니다.
(11)비파형청동검: 단군조선의 비파형청동검은 단군조선이 서토와 구별되는 선진 청동문화를 가진 정치세력 집단이었음을 가장 단적으로 나타내는 대표적인 단군조선의 유적유물입니다. 이 정치집단의 분포도는 환단고기가 말하고 있는 역사적 시기와 역사적 강역이 너무도 일치하는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비파형청동검의 분포지는 만주, 한반도, 중국대륙의 동편으로 환단고기가 설명하고 있는 역사강역과 완전히 일치하며 그 연대도 완전히 일치합니다.
(12)고인돌유적: 환단고기의 태백일사가 설명하고 있는 고인돌에 대한 기록 또한 환단고기의 사료가치성을 유적유물로 뒷받침하는 단군조선의 실존적 증거물입니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서는 배달국 신시시대의 장묘문화로부터 고인돌시대 장묘문화와 삼국시대의 장묘문화까지를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환단고기는 이와 같이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의 실상을 연대기와 역사기록과 역사강역을 정확히 표시하고 있는 아시아의 대표적 역사서이며 세계적인 역사서인 것입니다.
(13)하북성 중산의 천자명문: 하북성 중산묘에서 BC 10세기 것으로 보이는 청동도끼가 발견되었는데, 그기에는 `천자건방중산후`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군조선의 핵심강역인 서요하 지역에서 출토된 BC 22세기의 도자기 부호와 양식이 완전히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BC 22세기부터 BC 10세기까지 북경과 하북성 일대를 다스린 것은 단군조선의 천자였음을 기록한 환단고기의 기록을 그대로 뒷받침하는 것입니다. 서토인들이 최초로 천자(황제)를 참칭한 것은 BC 221년의 진시황이었습니다.
(14)요녕성의 `번한` 명문: 요녕성 대집둔 지구에서는 환단고기가 기록하고 있는 단군조선의 제후국 번한(번조선)의 명문이 나타나 환단고기의 사실성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요녕성 대집둔 지구에서는 番汗(번한/번조선)을 나타내는 `番干`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은으로 만든 도장이 발견된 것입니다. 단군조선은 개국과 동시에 진한(요하지역)과 번한(황하/하북성)과 마한(한반도/만주) 등의 삼한(삼조선)으로 나누어 다스렸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을 그대로 뒷받침하는 유물유적이 출토된 것입니다.
(15)단, 기, 언, 고죽 명문: 서요하 지역의 적봉시 하가점을 중심으로 하북성에서 요서지역싸지 출토되는 청동기 문화 유적지를 `하가점하층문화`라 부르는데, 여기서는 단군조선을 나타내는 단(亶), 단군조선의 제후국 기자조선(번한/번조선)을 나타내는 기(기), 단군조선의 제후국 서국의 서언왕을 나타내는 언(언), 단군조선의 제후국 고죽국을 나타내는 고죽(孤竹) 등이 광범위하게 출토되고 있습니다. 모두 환단고기의 기록을 참고하지 않으면 알아 들을 수 없는 명문들이니다.
(16)남녀조각상과 곰석상: 서요하지역의 적봉시 홍산과 나사대 지역에서는 환웅과 곰녀를 상징하는 남녀조각상과 곰석상이 출토되었습니다. 서요하 지역의 적봉시 홍산유적지에서는 갑골문의 초기형태가 발견되어 은나라의 갑골문이 홍산문화 담당자들에 의해 전해졌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홍산문화와 나사대 문화는 대체적으로 배달국 시대(BC 3898년과 BC 2333년 사이)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17)배달국의 녹도문과 창성조적비: 환단고기에는 BC 3898년 18분의 환웅 중 배달국을 건국한 제1세 거발환 환웅께서 신지에게 녹도문을 창안할 것을 명하고, 배달국의 역사기록을 담담시킵니다. 그런데 이 녹도문이 한국의 평양에서도 발견되었고, 산동성의 창성조적비에서도 발견되었습니다. 평양의 녹도문과 창성조적비의 글씨는 모양과 형태가 배달국의 녹도문임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환단고기의 사료가치성이 이렇게 높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18)가림토문과 일본의 신대문자: 환단고기에는 BC 2181년 제3세 가륵 단군이 을보록에게 정음38자를 창제할 것을 명합니다. 그런데 이 가림토문의 흔적은 지금의 한글에 그래로 남아 있고, 일본의 신대문자에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일본 `구주신사`의 가람토문비석이나 `이세신궁`의 가림토문청동거울은 한글비석과 한글청동거울이라 명명하면 딱 들어 맞을 정도로 완벽한 가림토문입니다. 또 인도의 구자라트 문자 역시 그 형태와 내용이 한글(가림토문)과 흡사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19) 요하는 압록이고 난하는 요하: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는 지금의 압록강은 `동압록`이고, 지금의 요하가 `압록`이고, 지금의 난하가 `요수(요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요하가 압록이란 사실은 중국요사지리지와 삼국유사도 정확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요하가 압록이고 지금의 난하가 요수임은 서토의 고지도 `지리도` `연산도` `중국삼대간룡총람지도`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환단고기가 얼마나 정확한 기록을 반영한 역사서인지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20)낙랑군과 낙랑국: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와 북부여기는 낙랑군과 낙랑국에 대한 근거를 가장 명확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낙랑이란 지명이 나타나는 것은 BC 1767년 제13세 흘달 단군, BC 1237년 제23세 아홀 단군, BC 195년 북부여 제1세 해모수 단군, BC169년 북부여 제3세 고해사 단군 때입니다. 특히 BC 195년에는 낙랑왕 최숭이 보물을 싣고 마한의 서울 왕검성으로 가는 장면이 적혀 있습니다. 이때부터 하북성의 낙랑군과 한반도의 낙랑국이 구분되어 나타납니다. 환단고기는 고대사의 비밀을 푸는 판도라의 상자입니다.
환단고기의 사료가치성은 이렇게 명확히 나타났습니다. 환단고기를 통해본 아시아 정확히 말해 극동삼국 `한국` `지나` `일본`의 역사는 역사가 아니라 이미 범죄 수준의 무협소설입니다. 아시아 대륙과 중국대륙 그리고 만주와 한반도에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 72세 6962년의 역사를 모조리 무덤의 역사로 파묻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불행한 역사를 이제는 제대로 밝혀야 합니다. 부끄러운 동양의 얼굴을 다시금 찾아야 합니다. 이것은 민족사적 요청이며 동양사적 요청이며 세계사적 요청입니다.
-<아!고구려>의 저자 배달 허성정 |
출처 :한민족의 뿌리와 미래 원문보기▶ 글쓴이 : 기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