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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긋남

우태닝 2015. 4. 1. 16:03

어긋남

 

한 청년 노예가 어린 시절부터 노예 생활을 접고 탈출을 했다. 하지만 개들의 추격을 받아야 했고, 또한 추격이 끝난 이후에는 늑대들 추격을 피해야만 했다. 그래서 온 몸에 상처 투성이로 마을에 내려와 도움을 청했지만, 사람들은 기겁을 하고 피할 뿐이다. 온 몸에 고통과 배고픔보다 더 고통스런 냉대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외적인지 아니면 탈옥한 죄수인지 더욱 의심스럽고 혼란스러워했다. 이 노예에게는 물 한 모금이 간절한데, 사람들 무리과 매질이 더 소름이 끼쳤고 사람들 돌팔매질을 뒤로하고 달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곧 청년 노예는 지쳤고 마음 외진 곳에 교회 앞에서 쓰러졌다.

 

교회 안에는 성직자 한 명만 있었다. 예전에는 많은 성도가 있었고 신부와 수녀님들도 많았었다. 그러나 마을 주변에서 오랜 전쟁과 이 마음에 덮친 장마와 가뭄은 마을 사람들을 많이 떠나게 했고, 마음에서 마을로 퍼진 전염병은 남아 있는 사람들 마저 죽음의 무덤으로 몰려들어가게 했다.

 

마을 안이든 교회 안이든 사람들 인심은 변하고 서로 욕을 하고 다투는 일이 빈번했고 그 싸움은 과격하여 서로 사람들이 모이기를 꺼려하고 두려워까지 하게 되었다.

 

교회 안 신부는 교회 성도가 다시 모이기를 원했고 새로운 신앙을 위해 많은 수고와 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신부 혼자는 너무 무리였다.

 

신부는 교회 앞에 쓰러진 노예에게 말을 걸었다. "왜 여기에 누워있는가?" 물었다. 하지만 노예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누가 자기에게 작은 소리로 말하는 것이 꿈에서 누군가 자기에게 말을 거는 것같기만 했다. 그렇게 하루 밤을 교회 밖에서 잠이 들었다.

 

신부는 다시 밖으로 나와 자신에 굶주림으로 노예에게 먹을 것을 줄 것은 없었다. 아마도 교회 안에 먹을 것이 떨어진 것이 하느님 신비만큼이나 모를 일이었다.

 

신부는 어떻게든 노예가 필요했다. 교회도 청소하고 텃밭도 가꾸고 새로운 신앙도 연구하고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더욱 노예가 필요했다.

 

그래서 신부는 노예를 데려오기로 마음먹고 청년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노예는 아직 잠인지 꿈인지 구분하기힘들었다. 그리고 신부 이끌림에 교회 안 긴 의자에 앞으로 걸쳐 앉았다. 신부는 그 앞 의자에 뒤로하여 마주 앉았다. 마치 고해 성사하는 분위기로 차분하였다.

 

청년 노예는 자기 신부에게 청혼 하듯 물을 권했다. 신부는 먼저 그리스도를 믿냐고 물었다. 하지만 굶주림과 갑자기 찾아 온 한기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몸에 상처 고통이 자기도 모를 신음 소리가 나왔다. 신부는" 이 악마야 하느님을 믿느냐?" 하고 명령하듯 말했다. 청년은 "간절히 저를 자유하게 해 달라"고 했다. 신부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 종이 되어 여기서 일을 하라"고 했다. 하지만 노예는 "더 이상 노예가 되고 싶지 않다"고 간절히 호소했다. 하지만 신부는 "거짓꼴로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했다. 청년은 어린 시절부터 노예 생활에 비참함을 간절히 말하고 싶었다. 아마도 청년이 처녀에게 청혼하여 자기 신부가 되어 달라고 하는 것보다 더욱 간절히 하소연 하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청년은 그게 살아있는 마지막 바람이고 마지막 움직임으로 의자에 앉아 걸쳐진 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신부는 이 죽음을 목격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한 사람의 구원이 이렇게도 불가능한 것인가!" 참으로 비통한 심정일 것이다.

또한 신부도 이게 자기에게 찾아오는 마지막 기회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신부는 더 이상 힘을 내어도 더 거두울 것이 없음을 알았다. 더 희망을 품을 수 없을 것인지, 아니면 더 육체적 굶주림에 더 버틸 수 없는지는 신앙의 신비처럼 알 수 없이 신부도 자기 앉은 의자에 걸치듯 앉아 청년 머리 옆에 자기 머리를 올리고 몸은 이불을 빨랫줄에 널듯이 의자 허리받침대 위를 쭉 늘어지게 덮고 말았다.

 

아직 교회 안은 밝은 낮이었지만 그리 밝지는 않았지만 의자 허리받침대 위에 두 사람 모습은 분명히 알아 볼 수 있었지만, 이 두 사람에 사연은 충분히 알만큼에 장면은 아니었다.

 

이 모습은 많은 사람이 아는 것은 아니었다. 단 한 명에 화가가 기억 될 뿐이다. 이 화가는 자기도 죽기 전에 이 그림을 완성하고 죽고 싶은 불쌍한 화가였다. 혼자서 그림을 그리고 물감없이 이 그림을 상상했을 뿐이다.

 

아무도 이 아이에 그림을 이해하는 사람도 없었고 이 화가의 재능을 인정하는 사람도 없었다. 물론 이 화가의 부모도 화가 그림 솜씨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왜냐하면 부모는 화가 그림에 관심을 갖기보다 먹고 사는게 더 큰 관심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화가도 이 화가가 그리고자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고, 아무도 이 화가를 위해 그림 그릴 시간도 그림 그릴 재료도 지원해 주지 못 했다.

 

두 사람의 죽음을 설령 그린다 해도 아무도 돈 주고 사는 사람도 없고 그런 그림은 어떤 곳에도 전시해 놓을 사람도 없다. 이 그림은 이런 평가를 받기만 할 뿐이었다. 이 화가 존재도 그림처럼 보여지지 않았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사연인가? 하지만 이 가슴 아픈 소리를 느끼는 음악가가 있었다. 이 음악가는 장님에 벙어리이었다. 그래도 어릴 적에는 눈으로 보았고 글을 배웠었다. 하지만 시력을 잃은 후에는 말할 상대도 없었고 말할 기회도 없었다. 그래서 이 음악가는 결국 말을 잃고 말았다.

 

이 음악가는 이 소리를 놓지지도 않았다. 그리고 빈 공간을 가득 채워나갔다. 처음에는 괴물 소리 같고, 그 다음은 동굴안 짐승이 새끼를 낳는 것만 같았다. 좀 듣고 익숙하니 밤 바다에 파도 소리가 거세게 몰아 치는 소리만 같았다. 두럽고 떨려서 아무도 듣고 싶지않을 소리인지 모른다.

하지만 이 음악가는 포기 할 수 없었다. 이 소리를 거역할 다른 길도 없었다. 그래서 들과 산에서 노래를 했다.이 그림 속에 청년 노예 사연은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저 화가가 무슨 가슴 아픈 사연을 그리는 풍경을 그리듯 노래를 불렀다. 거센 바람 소리 같으면서도 잔잔한 물결처럼 햇빛을 타고 구름 스치듯이 음악 소리가 바람스럼 스쳐갔다. 그 스친 느낌이 햇살인지 작은 나뭇잎 움직인지 살아 움직이는 동물이 움직이면서 나는 풀들이 밟히는 소리인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나뭇가지가 꺾이면서 나는 소리는 분명이 알듯 모를듯 하면서도 알 것만 같았다. 잔잔히 흐르면서도 폭풍처럼 하늘과 땅이 이 뒤흔들리는 소리는 크지만 작은 소리였고 작지만 크게 떨게하여, 누군든 사라잡을 것만 같은, 음악으로 되어지는 것을 느껴서 알게 되었다.

 

음악가는 이 소리를 악보에 담고 싶었다. 그리고 여러 악기들로 연주하고 싶었다. 전과 다른 악기들과 전과 다른 연주 방식으로 다른 음악 장르이길 바라는 바람이 더욱 크기만 하였다.

 

이 음악가의 바람을 또한 누가 알아주고 또 누가 함께 해 주겠는가? 아무도 이 음악가의 음악을 들을 수 없기에 그저 푸념 속에 스치는 흥얼거리는 소리만 같았다. 어느 누구는 차라리 흥얼거리는 동물 소리를 녹음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비아냥될 뿐이었다.

 

악보만이라도 대신 씌어질 사람만 있어도 하는 간절한 음악가는 장님인 다른 연주자에게 찾아갔다. 이 음악가는 흥얼거리며 자기 음악을 들려주었다. 장님 연주자는 그 음악을 건반을 누르며 연주했다. 운동선수가 아니면 연주가 불가능해 보였다. 만일 이 장님 연주자도 신부처럼 했다면 이 음악은 연주되지도 못 했을 겁니다.

이 두 장님 음악가는 이 음악을 다른 장님 음악가에게 악보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 다른 장님은 선생님처럼 안내를 했고 학생처럼 묻고 들어서 그 음악을 그대로 옮기려고 여러번 쓰고 고치고 지우면서 애를 썼습니다. 마치 자기 인생에서 가장 큰 인내심이 필요하듯이 자기 한계를 극복해 나가는 장면이었습니다. 이 장님 음악가도 신부처럼 했다면 이 음악에 악보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이 세 장님은 무엇을 마신 것도 무엇을 먹은 것도 무엇을 얻은 것도 없지만, 보이지 않는 힘으로 살아있는 생명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삶에 보람을 느꼈습니다.

 

아이들은 이런 음악 소리를 위한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싶고 듣고 싶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 바람은 아직 요원해 보입니다. 아이들에 대해 아직 관심 갖는 어른이 많지 않으니까요.

 

어른이 자기 사랑하는 사람 얘기에 관심을 갖지 못하는 것처럼 어른은 자기 사랑하는 아이 마음 속에 진정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른이 그러듯이 아이들은 아이 바람을 어른이 되면서 잊혀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젊은 청년 노예가 되어 또 다시 탈출을 시도하고 있지요.

 

이번에는 이 노예가 진정으로 탈출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