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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읽는다는 것

우태닝 2016. 5. 3. 14:24
고전을 읽는다는 것

종교에는 경을 읽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원전을 읽는 것을 말하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현재 한글로 쓰여진 것이 아니면 힘이 듭니다.
그래도 책을 읽고 얘기를 하는 것은
고전의 한계 번역의 한계를 뛰어 넘는 것이지요.

특히 정치와 종교 얘기를 하는 것에 대한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고전을 읽어 원문에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원 저자에 더욱 가까이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책을 통해서 개인간 의견차와 생각의 차이를 줄이고
불필요한 논쟁을 피하려는 것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논쟁을 하면 서로 도움이 되기에
가장 오래 된 독서 방법인 것 같습니다.

원전에 가까운 고전을 읽다보니

도교와 유교가 크게 다르지 않더군요.
또한 불교의 소승불교 대승불교가 다르지 않더군요.
설령 다른 점도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더군요.
특히 기독교 성경을 보면 동양의 정신과 너무나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더라구요.

그전에는 성경 특히 기독교는 불교나 유교 특히 도교와 너무 다른지 알았습니다.
실상은 제대로 아는 것이 부족함을 느끼지 크게 문제는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렇습니다.

율리시스를 읽으면서
서양인과 동양인 생각이 크게 다른 것이 아님도 느낍니다.

그래도 부족한 점이 많지요.
그 아쉬움은 단 한 가지 무지이지요.
그 무지의 대상도 힘없고 약한 자들의 무지입니다.
이 무지가 기독교는 이단 논쟁이 끝없이 흘러나오게 하지요.
또한 동양은 다양한 문체보다는 정해진 문체를 강조하게 되기도 했지요.
심하게 책을 태우고 사람들을 학살까지 하기도 하지요.
크게는 종교와 이데오르기로 많은 학살이 있었던 역사를 보게 됩니다.

모르게 하는 것, 특히 약자라고 여기는 것에 대해서 말이지요.
그러나 현 시대의 최대의 고비는 약자에 대한 앎이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이는 그저 다양함입니다.
종교이든 정치든 문학이든 예술이든
사회 다방면에 다양함이 중요해 보입니다.
그러나 저 또한 차단하고 싶고 배우지 않아도 되고 책을 불사를 맘도 없는 것이 아니지요.
어쩌면 인간의 한계, 저에게도 그 한계가 분명히 있지요. 그래도 그 한계는 다양함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끝없는 무지를 건너서 서로 다양하게 존재하는 것이지요.
아는 것이 병이 되고 모르는 것이 약이 되지만,
저는 그래도 아는 것이 약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물론 중간에 그 한계를 건너야 한다는 의견은 분명합니다.

이는 종교의 벽, 정치 이데오르기라는 벽, 특히 중요한 것을 지키기위해서 열려 있어야 할 태도가 최고 정점에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게 가장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게 이 시대든 언제이든 이는 최대의 고지같습니다.

때로는 민족성에 걸리고
때로는 개인의 독특성에 걸립니다.
그러나 최대의 고비를 넘기면 그 한계는 오히려 가장 좋은 기회를 줍니다.
이 순서는 꼭 걸쳐야 하고 분명히 넘어야 할 과정인 것 같습니다.

고전을 읽으면서
알게 된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