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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 현명함과 우매함

우태닝 2018. 1. 1. 09:39

현대인 현명함과 우매함

 

현명한 것과 우매함은 결과적으로 너무나 같은 것 같다. 분명 다르지만 말이다.

 

현대는 물질 이익과 편리함으로 너무 진일보해 보인다. 그만큼 후퇴하듯 퇴행은 원시인만 못하게, 인류는 퇴보하기도 했다. 인류는 발전해 왔는지 정반대인지 총합은 변함이 없는지 모를 정도이다.

 

개인은 현명하게 이런저런 선택으로 생존하며 인류는 진화했지만 소수만이 현명했을 뿐이다. 아주 사악할 만큼. 그게 인류에게 긍정적인 점도 있는 경우와 부정적인 부정적인 점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왜 우매하게 될까? 결국 욕망과 탐욕이 가까운 점에 이익되어도 결과적으로 그게 우매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가 좋아 선택한 직업이 자기 자신을 한 가지 편견을 갖게 되어 다른 선택에서는 그 상대 반대편에서 자기 이익을 선택함에 그 직업에 단점이 되어 버린다. 자본가는 투자하나 소비자는 소비를 안해 자본가를 소멸하게 한다. 또 기술자는 투자를 받으나 다른 기술이 있어 투자를 못 받거나 퇴행으로 되돌아 온다. 자본이 기술인이나 기술을 쉽게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기술인에 의해 불확성이 높아지게 된다. 어느 누군가에게는 확실함이 높아지면서도 말이다. 현대인은 바로 앞에 있는 점을 선택적으로 잘 기억하나 뒤에 숨은 이면에서는 알면서도 지워버리듯 쉽게 잊는다. 그래야 자신의 자원를 집중해야 원하는 것을 겨우 얻기때문이다. 얻기위해 지불하게 되는 보이지 않는 점들에 의해 결국 우매해지는 것이다.

 

이 우매함도 잘 아는 현대인들은 알면서도 더 복잡하게 우매한 현명함을 선택하여 총합은 결국 우매함의 극치로 현명한 선택에 대한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렇게 지불하거나 거부하거나 침묵하게 되면서 더 무능해지고 더 큰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그래서 더욱 우매해 짐에도 그 우매한 선택을 계속하게 된다. 다른 선택에 또 다른 선택도 결국 하던 선택이 최선이 되기때문이다. 분명 최선이라기 보다 우매함에도 말이다.

 

그래서 이 우매함에도 소수는 언제나 현명한 선택을 하게 된다. 자의든 타의든 결과적으로 그 현명함으로 인해 누군가는 피해자가 되어야 한다. 현명함에 대한 우매한 현대인이 있기 때문이다. 이 또한 우매한 현명함이다. 마치 현명함에서 소수가 현명함이 있듯이 우매한 현명함이 있어서 지속적으로 현대 이익이 유지되고 계속 이 우매함에 머물게 한다. 그 우매한 선택에 현명한 우매함을 위해 대신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우매한 현명함이 있어 전체 총합에 총합은 언제나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인류 전체는 그대로 되고 있는 것인지 퇴보하는지 진보하는 정확한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말이다.

 

그래서 현명한 우매함이나 우매한 현명함이나 어느 것이 더 나은 것인지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현명함과 우매함은 같다면 같은 것이고 똑같다면 똑같은 것이다. 좀 같다고 보면 인류가 보다 더 현명하게 발전될 선택은 높아지리라 여겨야 한다. 그래야 좀더 멀리 보고 선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택 이면과 그 이익의 상대로 피해보는 입장도 고려하게 될 것이다. 이점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 이점도 보게 된다. 편리와 이익을 얻게 지불되는 의미와 그 항목들과 그 비용에 대한 가치도 바로 앞에 이익과도 비교 검토하게 된다. 이런 과정들이 인류는 분명 진화될 것이다. 앞 일과 뒷 일까지 모든 살펴 보는 점들이 우매한 결과로 되돌아 오는 경우에서 벗어나는 현명함의 근본이 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