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저는 광화문 촛불시위를 하면서 종합청사 옥상 문화부 세종문화회관 옥상을 계속 돌아봤었지요! 그 절정은 효자동 입구 서울 경찰청 앞이 열려서 청와대 100미터까지 가면서 군대 개입이 불가능해졌지요. 이미 많은 시민들이 평화 시위로 해외 언론과 외국방송기자들이 시위대에 함께 했으니까요!
가장 최정점은 서울 경찰청 앞이었고, 그 당시 폭력집회로 가나 평화집회 갈림길이었지요. 만일 폭력집회로 차벽이 무너졌다면 군대가 광화문으로 바로 왔었을 겁니다. 그 당시 좌파는 폭력집회 중심이었고, 일반인 다수는 평화시위이었지요. 그래서 촛불은 시민혁명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 당시 경찰이 차벽 중무장을 한 이후 뒤편에서는 차벽이 무너지지 않게 통나무 받침목과 쇠사슬이 차벽과 광화문 벽방향으로 쇠사슬이 묶을 수 있거나 경찰이 줄다리할 긴 밧줄이 널려있었지요. 그런데 그 벽이 그냥 개방된 것이지요. 저는 그 당시 군대가 들어오는 줄 알았지요. 그래서 저는 반대로 사직 터널로 갔었는데 그냥 텅 비워 있었지요. 그리고 구세군 회관 앞으로 가보았는데 그곳도 텅 비워 있었지요. 그리고 광화문역을 지나 종로로 갔더니 종로3가 넘어까지 일반시민들이 들어오는 걸 보고 안심을 했지요. 그리고 즐거운 성탄과 연말연시 되었지요.
왜 군대가 안들어왔을까? 먼저 김영삼 정부에서 쿠테타 방지법이 만들어진 것으로 봅니다. 어찌 되었든 중간이든 그 위든 명령계통이 쉽게 쿠테타를 못하게 법이 준비 되었고 평화집회에 폭력진압이 불가능했지요. 그리고 독일과 같은 외신들이 폭력상태를 막은 것이지요. 결정적인 것은 시민들의 평화집회이었고, 여성들의 평화 시위 목소리이었습니다. 또한 시민들 목소리에는 촛불이 폭력이 되면 경찰 특공대와 백골단 폭력이 발생한다고 한 목소리도 있었지요. 또한 폭력집회는 다수의 여자와 어린 학생들과 가족과 함께 한 시민들을 보호하기 어렵다는 시민들 자발적 평화집회를 외친 목소리이었지요. 경찰이 폭력시위 유도에도, 분명 경찰 폭력에도, 평화를 끝없이 외쳤던 시민들 목소리가 있었지요.
특히 어린 학생들이 차벽에 오르면 밑에서 학생보호와 평화집회를 외쳐가며 서로 한몸이 되어 폭력 집회는 불가능했었지요. 아니 시위자체가 평화로 갈 수밖에 없었지요.
다음 궁금한 점은 그 정점 이후는 왜인지 경찰이 광화문과 청와대 주변에는 모두 없었다는 겁니다. 단지 청와대 차벽 뒤로 시민들과 맞닿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 다음 경찰과 촛불시민과 경찰이 하나가 되었다는 겁니다. 대체 왜 경찰이 바뀐 이유가 뭘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