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비극
깨어있는 자의 고통은 알고도 몰라야 할 고통일 것이다. 차라리 모르면 오히려 더 나을 수 있다. 탐욕에 지쳐 나와 다른 누군가를 적대시 해야 존재하는 미친 형국이다. 그렇다고 살인도 폭력도 가혹한 인권유린도 없으나, 일상의 범죄와 부도덕함과 인간 파괴는 스스로에게 더욱 가혹해지고 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다. 스스로의 존재감을 위해 자신의 존재감을 지우고 있으매도 자신은 이를 알지 못하고 이 늪에 더욱더 빠져들고 있다. 인간 탐욕이 자연을 파괴하고 드디어 자기 자신마저 파멸을 목전에 두고 있다. 마치 긴 여행을 돌고돌아 찾은 낙원을 그동안에 비워둔 자기 고향, 자기 집이다. 그사이 기울고 파괴되어 사라진 자신의 터전만 맞닿게 된다. 긴 여행 속에 베인 이질감은 그남은 안식마저 잃게 만든다. 나그네의 설움만 깊어지는 것이다. 한 여인이 더 좋은 환경을 찾아 떠났으나, 더 박복함에 울먹이지 않을 수 없다. 여행의 병과 난관 역경 배신과 학대는 결국 스스로 내린 것이다. 이를 탓하기도 전에 자기 자신이 더 미워질 절망도 스스로 구하고 만들어 놓고 있는 것이다. 더욱더 이 깊은 한숨은 더욱더 고달프게 한다. 마치 신들이 무당처럼 최고 위치에서 최악을 벗어났으나, 더 참혹한 최악을 초래하듯 이 박복함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처럼 말이다. 재주 많아 출세하나 그 재주는 결코 남과 자신에 복도 행복도 만족도 주지 못한다. 오직 자기 자신의 착각과 도취에 취할 뿐이다. 한국과 세계 유명 연애인의 비극은 함께 자살을 독려할 뿐이다. 이 현대는 우수한 인간의 창작에서 더욱 자신과 지구를 파괴에 악용되듯이 말이다. 무당이 자기 운명을 바꾸지 못해도 남의 운명은 바꾼다. 그러나 정작 자기 운명은 바꿀 수 없는 모습이 현대인 자화상 그대로이다. 부와 편의를 취해도 더 남은 인간의 고뇌 속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결과이다. 그래도 이에 벗어나기 어려운 것은 그동안의 얻어진 성과를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원숭이 사냥처럼 스스로 잡아놓은 먹이가 그 먹이에 자신이 먹잇감이 되고만 것이다. 현명한 문어가 살기 위해 숨은 곳이 자신이 인간에 잡혀 먹히는 운명과 같다. 그래도 물고기와 같은 동물은 식물처럼 누군가에 무엇인가 존재감을 남기나 인간은 존재감마저 사라지게 한다. 있는 것이 존재하는 것만큼 해악인 것이다. 그래도 이마저 포기 못하는 집착! 지금 이 집착에 빠져있는 종교집단과 그 종교인과 이를 추중하는 인간의 속성이 자유를 주었으나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마치 종교 자유인양 한다. 스스로 만들어 가는 비극이 현대인의 마지막까지 남기는 여운이다. 물고기처럼 같은 동물처럼 식물처럼 세균과 박테리아 바이러스같이 조용히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 것 또한 존재감 상실만은 아닐 것이다.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사는 것이 자연이며 그 일부로 남을 수 있는 일치감이 진정한 존재감을 남기는 것이다. 아낌없이 주고가리라! 이 또한 자연의 이치가 아니겠는가? 열심히 살아서 커다란 성과는 물거품처럼 한숨처럼 사라지고 손에 쥔 것은 자기 파멸뿐이다. 그 파멸마저 흉하기만 하다. 살아있는 자연은 누군가에 봉양이며 덕을 고양하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