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현실의 답은 보편성.
전쟁
싸움
다툼
논쟁
토론
말싸움
이해상충
감정대립
오해
착각
자기 오만
자존감 상실
현대의 자존감 상실이 문제의 본질이다. 자존감을 높힌 듯 하나, 실상은 자존감을 오만하게 했을 뿐미다. 이는 착각으로 서로간 착각이 곧 오해가 감정을 대립시키고는 이해와 이익을 달리하게 된다. 참고 참다가는 이해상충지점에는 오해와 착각과 오만으로 자존감 상실을 덮으려 한다. 이는 말싸움의 근원이다. 이를 잘 해결하려 토론하나 논쟁뿐으로 답이 없다. 오직 착각과 오만의 결과에 매몰될 뿐이었다. 결국 답이 없는 논쟁은 대립이 아닌 다툼으로 고정화 확정화 되어 현대사를 장식하고 있다. 마치 세상이 다 그런 것처럼 인간의 오만과 착각으로 끝없는 오해와 갈등만 양산해 놓고 있다. 해결될 수 없는 수없는 배설물로 자연마저 파괴하고도 인류의 자존감은 상실로만 치닫고 있다. 아무리 전쟁이 날 이유도 없으나 결국 전쟁이 나고 만다. 모든 배설물만도 못한 근거로 확증나고 만다. 적장 필요한 전쟁마저 전쟁은 모두의 악이 되고 말았다. 모든 자존감에 이유가 있었으매도 말이다. 언제나 소중한 자아는 자존감이 필요하나 상실 위기를 만들거나 타자의 자존감을 망쳐놓고 만다. 이 또한 착각의 산물이며 이 또한 새로운 오해가 되고 그 오해는 합리화로 정당화 되어 또 다른 해결하기 힘든 갈등의 도화선을 만들어 놓았다. 종교와 이념과 민족주의 국가주의 그리고 남은 지역주의로 모든 오해와 착각과 자연보다 가치없는 것까지 파괴할 것들에 포장되어 갈등만 만드는 배설물의 벽을 쌓고 성을 쌓아 오염의 도시를 만들어 끝까지 지키려 한다. 그렇게 인류사는 이런 문명과 도시를 수없이 사라지게 했는데 말이다. 이를 다시 찾고 찾으며 또 다른 가짜로 본질에 접근보다 새로운 거짓을 위해 가짜를 만들어 놓았고, 또 다른 가짜를 만들기 위한 새로운 운명에 직면해 있다. 그래서 계속 싸우다가 전쟁을 촉발 시킬지, 또 다른 평화가 연장이 될까?
자기 감정의 보편화, 감정 연대의 보편성, 개인 의식의 보편성, 가족의 개별성에 대한 보편성, 소집단의 보편성. 친족과 민족의 보편성, 지역사회의 보편성, 그 민족만의 문제에 대한 보편성, 나라만의 지역적 환경에서 자신의 민족 역사만의 특수성에 대한 보편성, 나라간 특수한 이해 관계와 과거 역사와 지금의 역사에 대한 보편성. 바로 보편성의 문제이다. 보편성이 아닌 종교는 종교도 아니다.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예술과 학문이 언제나 파괴적이었을 뿐미다. 그 이념의 보편성 문제는 결국 그 이념만이 갖는 특성에 따른 현실의 보편성 문제이다. 학문과 예술이 보편적이지 않는 것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은 보편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종교가 이념과 전쟁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도 바로 종교만의 보편성이 그 문제를 뛰어넘었을 경우다. 내가 아직 종교에 매어있는 이유다.
유학이 이문제를 건너 종교와 민족간 지역간 문제를 넘어섰고, 현실의 문제에서 보편성을 갖을 때는 최고의 학문이 되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나라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보편성을 이루지 못하면 그나라를 사라지고 말았다. 집단과 특수한 계층이 이 보편성을 위해 희생을 감수했다면 존중되었으나, 그게 일부 계층에 이익과 특권에 악용되면 이는 곧 보편성 붕괴로 그 계층을 곧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도 지금 남아있는 것은 개인 자유에 대한 보편성이다. 지금 현대인에 개인 자유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전인류적으로 보존되거나 보전되어지고 있다. 개인주의 답이 아니라 보편성이 답이라는 것이다.
지금의 시대는 국가주의 시대이다. 가족주의는 개인과 지역 내 국가 내에서 보편성 형성에 문제가 많아 스스로 소멸하게 되었다. 개별 문제는 국가 내 법과 나라 특수성에 보호받는 범위 내에서만 보편성으로 인정 되었기 때문이다. 이 보편성이 부족한 나라는 약소국이나 버림받는 나라로 절락하고 만다. 가족주의가 강한 전통 사회에서 민주주의와 자유경제시장 범위에서 대한민국은 가족주의마저 무너져 국가주의로 더욱더 가속화되고 있다. 가족보다는 거대집단을 통해서 자아실현이라는 보편성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사에서 종교 예술 운동의 보편성을 이룩 한 부분에서 국가주의를 넘어서고 있다. 특별히 경제의 보편성이 세계화와 세계 경제의 확대로 경제보편성이 들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게 특권층으로 보편성을 잃으면 시장 경제도 붕괴될 것이다. 경제라는 수학과 경제학에 대한 보편성이라는 가치가 보편성을 현실화된다면 경제 보편성이 국가주의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음악과 미술 영화 학문과 문학에서 인류 보편성을 찾고 구해왔던 것만큼 존중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지금 우리 나라 대한민국과 세계 국제 질서의 변곡점에서 새로운 갈등 속에서 경제와 환경의 문제를 넘어서고 있다. 그러나 긴 평화 속에서 언제든 이 평화는 깨지고 전쟁의 보편성이 더 크다. 마치 개인 자존감 상실을 쉽게 직면하듯이 말이다. 개인과 자연의 일치로 보편성을 획득하듯이 인류 문제는 개인과 다수 무리와 얼마나 일치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이를 통해 유지된 평화가 지금의 국가주의가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 평화의 연장은 곧 보편성 유지와 확대이다. 지금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는 것은 강한 경제도 군사력이나 높은 수준의 과학이나 외교력이 아니다. 우리 각자는 내 주변과 국제사회나 내가 살고 있는 가족과 지역사회에서 얼마나 보편적일 수 있는지가 답인 것이다. 내 감정과 이해가 세상과 얼마나 일치할 수 있을까? 이는 보편성은 근본적 물음이 되어야 한다. 지금 내 나라가 인류의 문제와 환경과 경제 문제에서 우리는 얼마나 일치된 결론이 얼마나 더 보편적인가이다. 촛불을 들고 코로나19 전염병을 이겨내면서 우리 국민은 얼마나 보편성을 획득하였는가가 경험적인 보편성에 대한 확답이 되었으면 한다.